대화인가 선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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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관리자 기자 작성일2013-09-30 15:21본문
회담은 대화인가 성명인가
지난 주의 화두는 박대통령과 야당 여당 대표의 3자영수회담이었다. 40여 일간에 걸친 옥신각신 끝에 겨우 마련된 아주 귀한 자리였다. 한데 그 자리는 오히려 대통령과 야당의 이견을 날카롭게 노출시키고 결국 사태는 더욱 악화되었다는 평이 돌았다. 그 회담 결과를 두고 지상파에서는 연일 토론이 멈추지를 않았다. 접점을 찾은 것이 아니라 문제가 오히려 악화되어다는 판단 때문이다.
회담이란 것은 상식적으로 보더라도 서로 의견을 말하고, 자기주장을 하고, 또 상대방의 말을 듣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고집만을 세우기 위서라면 회담을 할 필요가 없다. 성명만 하면 된다. 상대방의 말을 듣고 내말도 하는 것이 회담이고 대화이다. 따라서 자기주장의 피력만을 계속하는 선언이나 원고 읽기는 회담형식에 어긋난다. 회담의 형식이 따로 있고 성명 선언의 형식이 따로 있다. 각각 따로 형편 따라 적용하면 된다.
그런데 이번 영수회담에서 한쪽에서는 원고지가, 눈에 띄이게는, 한 8장 정도가 될 정도의 글을 써 가지고 와서는 그것을 계속 읽으면서, 문장이 끝날 대마다 대통령에게 사과하라고 다그쳤다. 글을 써 왔다는 것은 회담 진행과는 관계없이 회담하는 동안 그 글을 읽어 내려가겠다는 뜻일 것이다. 남의 이야기를 들을 자세나 형식의 최소한도의 마음이 아예 애당초 없었다는 뜻이다. 그런 형평이라면 애써 회담을 할 필요가 없다. 공장에서나 국회 앞 계단에서 소리쳐 외치면 된다. 그리고 그런 것은 그 나름대로 그 효과가 크다.
대화의 문화
민주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적 자세는 나와는 다른 의견이 있다는 사실의 인정이다. 다양성의 인정이다. 반대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 한국인의 생활에 이런 문화의 정착이 힘든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교육에서 우선 그런 훈련이 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이다. 한국은 지금 세계에서 가장 교육열이 높은 나라로 손꼽히고 있다. 우리 고등하교 졸업생들은 1년에도 수없이 미국의 일류대학에 진학한다. 그런데 인터넷에 보면 그 우수한 학생들이 한 학기가 지나면 상당한 수가 탈락하다는 소식이다. 잘 한다 못한다고 하는 문제는 제처 놓고, 우리의 교육 현실은 교육방법에서 우선 상당 부분 미국교육과 그 정신이나 형식이 다른 것으로 보인다.
미국대학교육은 최소한 주입식은 아닌 것으로 안다. 토론식이고 대화식이다. 영어의 교육 곧 Education 이란 말은 Educe 곧 끌어낸다의 명사이다. 교육은 가르치고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고, 끌어내는 것이다. 아는 것을 말하게 하고 대화하게 하고 토론하게 해서 내 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고 그래서 설득시키고 이해하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다, 저것이다, 그렇게 선언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학생들은 그런 유형의 교육을 받아오지 못하였다. 교사의 일방적인 정보 전달을 그대로 듣고, 그대로 암기하면, 그것으로 성적이 나온다. 한쪽은 말하고 한 쪽은 가만히 듣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대화의 정신도 기술도 익히지를 못한 것이다.
우리나라 어린 시절의 가정교육도 대동소이하게 보인다. 아이들이 떠들면, 나가 놀아, 조용해, 공부해, 가만히 있어, 이런 식으로 언제나 구호식 경고식 선언이다. 데모를 많이 해서 그런지 언제나 내 주장의 선포요 선언이다. 길거리의 현수막은 단정적이다. 그것으로 끝난다. 대화로 하자는 말은 아주 미끈한 수사이다. 문서로 써서 넘겨주면 그것으로 더 이상의 의론이나 대화나 조정은 없다. 강압의 일종이 아닐 수 없다. 그런 경우는 어느 한쪽의 전취 아니면 항복밖에 없다.
선교는 상호행동 안에서 감동으로
우리교회의 전도와 선교에 그런 것은 없었는지 뒤돌아보고 싶다. <예수 천당>, <예수를 믿으라>, 이런 구호들이 우리 교회의 전통적인 전도방법이었다. 선언식 선포식 전도였다. 한 때 이런 것은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 한국교회 오늘의 세계적 부상에 이런 전도방범의 기여가 컸다.
하지만 이제 세상은 많이 달라졌다. 구호식 선포식인 것은 이제 다들 멀리하고 싶어 한다. 설득과 감동과 공감 그리고 합의와 동행이 요구되고 있다. 선교나 전도에서도 그렇다. 이런 것을 프린스턴신학교의 총장을 24년간 지낸 존 매카이 박사는 <말씀을 듣게 할 권리> (The Right To Be Heard)라고 말한 일이 있다. 우리의 복음적인 행동과 언어 그리고 마음에서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마침내 <기독교> 라는 말이 나오면, 마음으로부터 믿을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런 권리, 그런 과정, 그런 것이 참된 선교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런 것은 서로의 인격적인 상호행위와 교제에서만 가능하다.
한국정치의 경직을 보면서 우리도 생각이 깊어진다. 한국교회가 기왕에 가졌던 그 힘과 권위로써 이제 이런 선교의 방법으로 역사를 이끌고, 한국정치의 정도를 시범으로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강이 깊어진다. 그래야만 이제 세계교회로 부상한 우리 한국교회가 한국사회를 이끌고, 더 나아가 이 글로벌 시대에 세계교회와 세계를 영도할 수 있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